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글/소설

초단편 : 건너편 버스정류장

- 뭐야, 왜 여기서 끊어 감질 맛나게….

민주는 보던 페이지를 뒤로하고 다시 새로운 도피처를 찾기 시작했다.

그리고 보던 웹툰과 비슷한 내용을 하나 더 고른다.

요즘 한창 유행 중인 환생, 빙의물.

 

- 이 거지같은 세상. 눈 딱 뜨면 다른 세계였음 좋겠네

다섯 평 남짓한 작은 방.

민주는 한 눈에 들어오다시피 한 천장을 바라보며 매일 잠들기 전, 다음날 다른 세상이 펼쳐졌으면 하는 기대도 내심 해보지만 28년간 그런 일은 없었다.

 

오늘은 토요일.

퇴근 후 로또를 사고 집에 가면 딱 추첨 시간이다.

토요일에 출근하는 날이면 민주는 항상 건너편 버스 정류장 앞 작은 가게에서 로또를 샀다.

기껍지 않은 토요일 출근에 그럭저럭 만족할 수 있는 의식이었다.

- 하필이면 길 건너편에 있어서

습관적으로 가던 길이라 아무 생각 없었건만, 오늘은 저도 모르게 길을 건너 버스정류장에 도착해버렸다.

꾸준히 도전하면 언젠가는 되리라 하며 생각하며 항상 똑같은 번호 5개를 적어둔 종이는 몇 주 지나지 않았는데 금방 구깃해졌다.

- 그냥 갈까? 아냐, 이번 주에 당첨될 수도 있어. 이제 이 번호가 될 때도 됐지. 오늘 왠지 좋은 꿈 꾸지 않았나…?

주머니 속에 들어있는 로또 입력 종이를 만지작거리던 민주는 괜스레 잘 기억나지도 않는 꿈을 들먹이며, 오늘 로또를 꼭 사야할 이유를 만들어낸다.

 

횡단보도의 신호가 깜빡인다.

전광판에 표시된 버스 도착까지 남은 시간은 7.

지금 딱 뛰어서 건너가고, 로또를 사서 돌아오면 완벽하다.

이보다 완벽한 계획이 있을 수 없다.

- 그래, 망설이지 말고 바로 뛰어가자.

민주는 주머니 속의 종이를 꺼내 쥐었다.

깜빡이는 초록불이 꺼질까 냅다 달린다.

 

이상하다. 왜 눈이 부시지?

…? 이거 설마

 

-

몸이 붕 뜨는 게 느껴진다.

아픈건가…?

오늘 퇴근 전에 읽었던 눈을 뜨니 이세계의 공녀?’라는 책이 떠오른다.

- 그래 보통이렇게. 그리고 기절했다가 눈을 뜨면….

 

주위가 소란스럽다. 웅성웅성 하는 소리가 흐릿하다.

의식이 깊게 빨려 들어가는 것 같다.

하지만 뭔가 아닌 것 같다.

살고 싶다.

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낫다고 했나?

사실 죽는 건 아무렇지 않았다. 죽고 싶다고도 많이 생각했으니까.

하지만 죽음이 코 앞에 다가오자 이대로 죽는게 너무 억울하다.

이럴 거였으면이렇게 아등바등 살지 말 걸….

오늘 김대리한테 욕이라도 시원하게 해주고 올 걸….

 

아냐, 그래도 눈뜨면 지금보다 더 좋은 곳이 더 좋은 것 아닐까?

감각이 잘 느껴지지 않는다.

마치 잠들기 전처럼 생각이 끊어진다.

- 이렇게까지아무것도 아니었나…?

아득한 저 편에 의식을 맡긴다.

 

6, 23, 33, 42, 44, 45.

민주의 손에 쥐여진 구깃구깃한 로또 종이가 힘없이 바람에 날려간다.